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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건축과 사회 제30호, 2015년 11월

한국 건축설계산업의 미래를 위하여,
최소 건축설계 기간의 보장과 실비정산 방식의 설계계약 

     

양근보(근보양 앤 파트너스 대표)

     




 규모에 상관없이, 건축설계분야의 어려움에 대해서, 동 업계에서 일하고 있는 분들을 만날 때마다 수시로 듣고 있습니다. 비단 지난 1-2년 사이의 문제가 아니기에 새건축사협의회 차원에서 특집으로 이러한 내용을 다루고 미래를 모색하는 공론의 장을 여는 것에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그동안 부동산 시장의 폭발적 성장과 건설 위주의 양적 성장에 건축설계는 부가적인 서비스산업으로 인식되어 그 역할이 제한적이었습니다. 파이낸싱과 건설 주도로 건축프로젝트의 기간은 최소한으로 단축되었고, 이러한 분위기에 건축설계분야도 고수익을 위해서 많은 프로젝트들을 수주, 단기간에 압축적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설계기간은 점차 짧아지게 됩니다. 끊임없이 처리해야 할 프로젝트들이 넘쳐나는 양적 성장의 시대를 지나면서 결국 현시대에 건축설계분야에 남은 것은 “짧은 설계기간”과 그에 따른 “저가 설계비”입니다. 결국 건축설계분야는 열악한 근무환경 및 저임금의 직업군으로 분류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일례로 필자가 대학교를 졸업하던 2004년 당시에는 100명 가까운 졸업생들 중에서 20% 정도가 건축설계분야로 진출했지만, 현재는 5%만이 설계분야로 진출해 계속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근무환경 및 처우가 일반적 수준보다 낮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고 때문에 이러한 현상은 당연한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건축설계 분야로 진출하는 졸업생들의 기본소양은 10여 년 이전과 비교하면 월등히 높아졌다고 봅니다. 인터넷의 활성화와 아마존, 해외직구와 같은 국가 간 개인 거래가 활발해지고, 영어에 익숙해지면서 건축설계에 관한 전문적 정보들은 더 이상 지리적으로 닫혀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건축학 5년제 제도에 맞춰서 외국에서의 교육과 경험을 갖춘 교수 및 강사들이 대거 국내 대학교들에 유입되면서, 현재의 대학교육의 수준과 졸업생들의 능력은 미국 등의 선진국들과 비교해서 평균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의 건축대학 3, 4학년들은 이미 5년제를 선택하여 설계분야로 진출할 것을 결정했음에도 본인의 진로에 대해서 다시 고민하는 학생들이 3분의 1 정도는 됩니다. 아쉽게도 국내의 열악한 현실로 인해 설계분야로의 진로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중국어나 영어를 준비해서 중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로 진출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상담해 준 적도 있습니다.

 2013년 기준으로, 미국 설계사무소의 신입 초봉은 5~6만 달러, 혹은 능력에 따라 그 이상이었고, 중국(상하이, 홍콩, 베이징)의 경우는 영어를 하는 선진국 학위가 있는 외국인은 6~9만 달러, 자국인은 2.5~3만 달러 선이었습니다. 중국 자국인의 경우에는 사회주의 국가라서 9시 출근, 6시 퇴근이 일반적이고, 소수의 핵심 인력 및 외국인들만 야근을 합니다. 현재의 한국 설계분야는 중국 내국인 수준으로 받으면서, 야근을 감안하면 1.3~1.5배 이상 일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야근수당을 통상임금의 1.5배를 지불하든가, 일한 시간만큼 계산하여 휴일을 제공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물론 모든 회사가 지키는 것은 아니지만, 소송으로 이어지면 개인이 승소할 확률(이미 많은 판례가 있음)이 높아서 대체적으로 지키고 있는 상황입니다.

        한국사회가 개인의 행복을 누리는 방향으로 변해가는 시점에서, 설계분야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회사가 “고통분담”을 요구하는 것은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건축에 대한 열정만큼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졸업생들은 많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면, 건축사사무소의 회사운영에 관한 체질개선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서울시가 “건설에서 건축으로”를 표방하면서 입찰방식에서 공모방식으로 공공프로젝트들의 진행방식을 변경하고, 공공재로서의 건축의 질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은 이미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많은 외국인들이 찾는 세계적 도시이기 때문에, 도시의 이미지를 개선시키려는 일환으로 공공건축물들을 시발로 도시적 환경을 매력적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방의 도시들도, 관광객 및 거주자를 끌어들이는 것이 지역경제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고유한 특색을 유지하고 드러내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방의 도시라 하더라도 한국 내에서 경쟁하고 있는 것만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50대 이하 국민들의 상당수가 해외여행을 한 번씩은 해봤을 정도로 일반 시민들의 눈높이는 높아졌고 점점 더 높아지고 있습니다. 결국 도시환경 개선을 위한 좋은 건축물을 설계하는 건축가들의 노력은 과거와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더 섬세한 노력이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핸드폰을 예로 들어 살펴보면, 신제품이 하나 출시되려면 외형적인 디자인, 재료,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창안에 엄청난 양의 연구개발비와 연구개발 시간이 투입됩니다. 원칙적으로, 완성도 있는 높은 수준의 건축물을 설계하는 과정은, 매년 새로 발표되는 갤럭시 S 시리즈나 애플 아이폰 시리즈의 개발과정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품질에는 당연히 그만한 시간과 비용이 따라야 하나, 한국 건축설계분야의 현실은 시간과 비용이 미국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치고 있습니다.

 설계비 정상화, 설계업에 종사하는 직원들의 처우개선 등의 문제는 결국 일한 만큼의 대가를 보상받지 못한다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설계계약의 방식은 크게 총액일괄 계약방식, 실비이윤 정산방식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전문직들은 대부분 실비이윤 정산방식을 기준으로 합니다. 공사비의 몇 퍼센트, 계약금액의 몇 퍼센트 등의 방식은 디테일한 자료가 없는 경우이거나 공격적으로 계약할 때나 쓰는 낙후된 방식입니다. 건축설계분야도 회사운영에 있어서 경영교육을 통한 효율성 및 고도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시중에 유통되는 제품을 예로 들어 살펴보면, 재료비, 인건비, 마케팅비, 유통비 등의 직, 간접비에 이윤과 세금을 더해서 최종 판매가가 정해집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회사는 영리를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 기본 전제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건축설계분야에서도 실비에 이윤을 정산하여 청구하는 방식으로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물가변동과 시대변화에 따라서 변동되는 실비를 적절하게 감안하려면 실비이윤 정산방식이 적합합니다. 효율적으로 인력을 운용하고 능력에 따라서 합당한 임금을 지불할 수 있도록 설계비 청구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세월호 침몰사고, 판교 환풍구 붕괴사고 등의 안전문제가 한국사회를 뒤흔든 여파로 설계-감리 분리라는 법 상정으로 건축계가 한바탕 홍역을 앓고 있습니다. 안전한 건축물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설계인력의 투입시간을 규모별로 법제화해야 한다는 것이 더 일차적인 접근이라고 생각됩니다. 최소한의 설계시간을 지키면서 건축물을 설계했는지, 허가권자가 그 이행여부를 확인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 확인을 위해서 투입된 인력의 임금내역 및 건축주의 설계비 지급내역 및 계약서 사본을 제출하도록 하여, 최소한의 설계시간을 투입하여 건축물의 설계에 임하도록 하는 보완장치가 필요합니다. 기존의 지적재산권을 갖는 건축물과 유사한 경우에 한해서는 그 입증 범위에서 허가권자의 허가를 받고, 법정 최소 설계시간보다 적은 시간을 투입한 건축물의 허가를 허용하는 예외조항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건축물의 품질과 안전성을 위해서는 적절한 시간과 비용이 투입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법학전문 대학원제도의 정착과 함께 변호사업에 대한 양적 완화가 추진되고 있습니다. 이의 결과로 “건축주-건축사-시공사” 간의 법률적 분쟁이 본격화 되리라 예상됩니다. 설계사무소의 프로젝트 보험가입이 의무화되고, 설계도면 및 시방서가 건축물의 하자에 대한 법률적 근거가 되고, 소송의 규모가 합의금의 수준을 벗어나게 되는 시점에서는 건축사사무소들은 다시 대전환의 시기를 갖게 되리라 예상됩니다. 현재 대부분의 설계사무소에서 작성하는 디테일의 수준과 지식이 시공사보다 많이 부족한 상황이라, 대대적인 인력수혈이 필요하며 시방서 및 상세도의 외주가 급속히 늘게 됩니다. 이러한 조건들이 설계기간과 비용에 눈에 띄는 증액요소로 작용하리라 예상됩니다. 설계도서의 잘못으로 발생되는 공사비 증액 등에 대한 책임이 설계사무소에 물리게 될 소지가 충분합니다. 이러한 향후 전개될 사안에 대한 탄력적 대응 및 설계비 내 위험요소 제거를 위해서도 설계비의 실비이윤 정산방식으로의 전환이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건축사의 양을 조절하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기존 건축사들의 권익은 유지할 수 있으나, 미래의 건축설계분야를 책임질 인재들의 이탈을 막을 수 없습니다. 지속가능한 건축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작 지속가능한 건축설계분야에 대해서는 아무런 노력이 없다 하겠습니다. 기껏 고민 끝에 한다는 것이 설계-감리 분리라면, 건축계 전체는 이제 건축을 공부하고, 설계실무를 시작하는 젊은이들에게 스스로를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건축설계분야의 저변확대와 보다 양질의 서비스를 위해서는, 적게 수주하고 더 많은 시간을 투입하는 방식의 설계로 변환되고 투입한 시간과 노력에 맞는 설계비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적절하게 보장되는 설계기간과 그에 상응하는 설계비용은 좋은 건축가들이 작품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되고, 모든 건축사들이 저가수주 경쟁이 아니라, 디자인 경쟁의 틈에 놓이게 되면서 건축물의 질로써 경쟁하는 시대, 도시환경의 개선 등이 구현되고, 궁극적으로는 건축사가 곧 건축가요, 건축가가 곧 건축사가 됩니다. 그에 반해, 현재와 같은 짧은 건축설계기간이 지속되면, 적당한 수준의 건축물들만 양산되는, 양적 건설의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해외의 유명한 설계사무소나 대형 설계사무소에 다니는 한국인들을 살펴보면, 회사 내부적으로 실무적 능력을 굉장히 높게 인정받고 있기에 대부분의 회사는 한국인의 채용에 무척 긍정적인 편입니다. 한국인이 지닌 건축설계에서의 세계적 가능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 국내 대학과 해외 대학의 수준은 비슷해졌고, 한국 건축의 비약적인 발전을 위한 씨앗들은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지속적으로 자기개발과 좋은 디자인 경험을 쌓을 수 있는 환경만 제공해 줄 수 있다면, 한국 건축의 미래는 매우 밝을 것이라 기대해 볼 만합니다. 문제의 핵심인 짧은 건축설계기간은 우리가 이미 갖추고 있는 가능성을 제한하고, 이미 높은 수준의 눈을 갖고 있는 건축주에게 국내 건축설계인들의 이미지만 격하시키는 원인입니다. 최소 건축설계기간의 법적 보장은 건축물의 품질확보 및 안전성, 설계비 현실화, 미래 세대를 위한 건전한 건축설계환경의 제공을 위한 중요한 토대로, 현재의 열악한 건축설계환경을 타개할 기반이 됩니다.

     

    

저널정보

새건축사협의회

건축과사회 학술저널

건축과사회 통권 제30호

2015.11 162 - 165 (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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